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상팔국의 난 (문단 편집) == 전쟁 발발의 원인 == 이렇게 보면 포상팔국과 안라, 신라 무려 10개국이 얽힌 국제전이었으나 그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이다. 금관국이 경쟁국이던 안라국을 배제시키기 위해 포상팔국을 사주했다거나, 아니면 안라국이 전기가야의 맹주이던 금관국의 세력 약화를 위해 인접국을 사주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별다른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이는 근거가 없던 시절 성립한 가야연맹체론에 입각한 2차적인 추정일 뿐이며, 가야연맹체론 자체가 학계에서 거의 폐기된 학설인만큼 거기에 기반한 2차적인 추정도 아무런 기반이 없다. 다만 역사고고학적으로 어느 정도 이 전쟁의 발생원인을 추정해볼 수는 있다. 포상팔국으로 추정되는 국가들의 대부분은 현재의 경상남도 고성, 사천 등 경남 서부 남해안의 해안가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3~4세기대 이 지역 고분에서는 함안양식토기, 즉 안라국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당시 도질토기가 가진 위상을 생각한다면 이 지역은 안라국의 강한 영향 아래에 놓여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대로 4세기 전엽 국제 정세는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포상팔국은 낙랑-대방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한반도-일본열도 해상교역망 속에 연계되어 있었는데[* 이 시기 선진 문물이 해안선을 따라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를 잘 반영한다. 한반도 동남쪽에 짱박힌 금관국이 가장 선진적인 문물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도 해상교역 집단, 그 중에서도 일본과 한반도를 경유하는 결절지였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포상팔국 중 일원인 사천의 사물국 근방에는 늑도 유적이라고 기원전후한 시기 낙랑계열의 해상교역 기지 유적이 위치했었다. 물론 늑도 유적의 시기는 기원전후에서 1~2세기로 약간의 차이는 있다], 3세기 말부터 시작된 군현의 약화와 고구려의 성장, 그리고 군현의 멸망은 이 교역망에 참가하고 있던 포상팔국과 안라국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이 지역은 안라국의 관계망 속에 속하고 있었으므로, 이때 발생한 모종의 체계의 불안과 균형의 흔들림은 자연스럽게 안라국에게로 향했을 것으로 쉬이 유추할 수 있다. 즉, 3세기 말~4세기대의 해상교역을 중심으로 한 국제교역망과 질서의 붕괴로 인해 포상팔국 지역에 미치고 있던 안라국의 리더십이 크게 금이 갔고, 이것이 포상팔국이 안라국을 공격하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외에도 백승옥, 남재우 교수는 해상교역보다는 농경지 확보에 중점을 둬 포상팔국이 농경지 확보를 위해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과정에서 벌인 전쟁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